온돌의 기원
온돌은 기원전 5000년쯤의 신석기 유적에서도 볼 수 있으며 4세기 경의 황해도 안악 3호 분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그려져 있다.
온돌이 방으로 만들어진 통구들의 형태는 고려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부유층에서 사용 되었으며 병자나 노인의 방에 주로 사용되었다.
만드는 어려움이나 관리, 그리고 연료의 소모로 볼 때 고급스러운 난방 방법으로 여겨졌다.
태종 17년 (1417년) 윤 5월 14일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당시 설립된지 얼마 안 된 성균관의 유생들 중 병을 앓는 이들을 위해 온돌방 하나를 만들도록 한 기록이 있다. 이로 볼 때 전면적으로 온돌 방을 사용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후 세종 7년(1425년)에는 성균관의 온돌을 5칸으로 늘리도록 하였으며 16세기가 되어서야 전부 온돌 방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모두 침상을 사용하였으며 나무마루 바닥이었다.
조선 명종 18년(1563년) 2월 4일에 임금의 침실에서 화재사고가 있었는데 이때의 정황 설명 중에서는 임금의 침상에 작은 온돌구조를 만들어 자리를 덥혔는데 이때 부주의로 돌을 잘못 놓아 불기가 침상에 닿아 불이 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인조 2년(1624년) 3월 5일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는 광해군 때에 이미 사대부의 종들이 사는 방조차 모두 온돌인데 나인들이 판방에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여 나인들의 방도 온돌 방으로 바꾸었다는 대목이 나와 궁궐에 온돌의 보급이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후가 유난히 추워서 소 빙하기라고도 불리는 16~17세기를 거치면서 온돌은 점점 많이 보급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보통 백성의 초가집에도 온돌이 넓게 사용되었다.
온돌의 연료
전통적인 온돌은 아궁이의 연료로 주로 짚, 또는 나무를 사용했다.
숙종 때의 김덕기는 동래에서 말똥으로 만든 땔감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숯이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온돌은 땔감으로 나무를 너무 많이 소모하였으며 환경을 파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땔감은 면포와 쌀과 함께 가장 중요한 생활용품이었다.
1960년대 이후로는 주 연료가 연탄으로 대체되었으며 현재는 석유, 가스를 사용하는 보일러가 많이 보급되었다.
궁궐에서는 시목을 공물로 제공하는 기인(其人)이 땔감과 숯을 공급하였으며 민간에서는 보통 사내아이들이 나무꾼 노릇을 많이 하였다.
현대의 온돌
ㆍ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산화탄소 중독의 피해를 줄임과 동시에 열효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돌 형식을 활용한 온수 보일러가 개발되어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가정에서의 난방 방법으로 전통의 온돌을 대신하여 온수보일러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도시 지역 등의 온돌용 연료 수급이 어려운 지역에서는 전통 온돌을 보기 힘들며, 그 대신 온수 보일러, 온돌 마루, 심야 전력을 이용한 전기온돌 등의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편의성, 전통적 연료의 공급 문제, 가스 중독 등의 안전성의 이유와, 설치와 관리의 용이함 때문이다.
현재의 온수 보일러는 연탄, 석탄, 석유, 전기 등, 다양한 에너지를 사용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종류의 연료를 혼용할 수 있거나, 연탄이나 석탄 연료의 반자동 교체, 심야 전력의 사용 등 열효율과 편의성을 고려한 비용 절감형의 새로운 설계가 계속 연구 개발되고 있다.
온돌용 연료 구입에 큰 장애를 받지 않는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전통 온돌이 시공되고는 있지만, 연료와 가스 중독 문제 때문에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등은 관계 법령에 따라서 엄격한 시공 규격과 시공 감독 사항이 적용된다.
사람이 사는 집 외에도, 축사와 온실의 난방 방법으로 농가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연료 (짚과 나무 혹은 연탄)를 사용하는 전통 설계 형식의 온돌이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온수 파이프의 동파나 관리상의 이유 등으로 온수 보일러의 설치가 적당치 못하고, 석탄, 석유, 가스 등의 지속적인 공급이 어려운 오지, 산지 고지대, 도서지역 등에서는 아직도 전통 온돌이 빈번하게 시공되어서 사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