온돌

온돌이란?

온돌이란?

온돌의 개요

온돌은 한국의 전통적인 가옥 난방 방법이다. 방구들이라고도 한다.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고, 아궁이에서 생성된 열기를 머금은 뜨거운 연기가 구들장(방바닥)을 지나면서 난방이 되고, 그 연기는 구들장 끝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방식의 난방 방법이다. 온돌과 비슷한 개념의 대표적인 장치로는 불목이나 개자리가 없는 원시적인 형식의 (아궁이와 고래만으로 구성된) 로마 시대 대형목욕탕 온수 공급 방법인 히포 코스타(Hypocaust)가 있다. 또한 히포 코스타에서 파생되어서 중세 성(城)의 난방 장치로 쓰인 글로리아(Gloria)도 들 수 있다.

세계의 난방

서양의 벽난로나 일본의 이로리 등은 열원을 직접 이용하는 난방 장치인데 비해, 온돌은 열기로 구들장과 구들장 아래의 고래를 데워, 발생하는 '간접 복사열'을 난방에 사용한다는 특징이 있다. 때문에 잘 만든 구들장이라면, 아궁이에서 직접적인 열원을 제거한 이후에도 구들장의 열기가 비교적 장시간 지속된다. 좋은 구들의 조건은 이 "잔류 온기" 가 얼마나 오래가는가에 달려 있다.
단점은 구들(방바닥)이 갈라지거나 깨지면 연기가 올라와서 일산화탄소 중독을 일으킬 수 있다는 점이다. 열효율의 문제도 들 수 있는데, 자기 전 불을 지펴서 그 잔류 온기로 온 밤을 지내기 위해서는 필요 이상 과하게 열을 가하게 된다. 또 다른 단점은 온돌의 구조상, 아랫목과 윗목에 온도차가 발생한다는 점이다.

온돌의 기원

온돌은 기원전 5000년쯤의 신석기 유적에서도 볼 수 있으며 4세기 경의 황해도 안악 3호 분의 고구려 고분벽화에도 그려져 있다. 온돌이 방으로 만들어진 통구들의 형태는 고려 말부터 나타나기 시작했다. 주로 부유층에서 사용 되었으며 병자나 노인의 방에 주로 사용되었다. 만드는 어려움이나 관리, 그리고 연료의 소모로 볼 때 고급스러운 난방 방법으로 여겨졌다. 태종 17년 (1417년) 윤 5월 14일의 조선왕조실록에서는 당시 설립된지 얼마 안 된 성균관의 유생들 중 병을 앓는 이들을 위해 온돌방 하나를 만들도록 한 기록이 있다. 이로 볼 때 전면적으로 온돌 방을 사용한 것은 아님을 알 수 있다. 이후 세종 7년(1425년)에는 성균관의 온돌을 5칸으로 늘리도록 하였으며 16세기가 되어서야 전부 온돌 방이 되었다.

일반적으로는 모두 침상을 사용하였으며 나무마루 바닥이었다. 조선 명종 18년(1563년) 2월 4일에 임금의 침실에서 화재사고가 있었는데 이때의 정황 설명 중에서는 임금의 침상에 작은 온돌구조를 만들어 자리를 덥혔는데 이때 부주의로 돌을 잘못 놓아 불기가 침상에 닿아 불이 나는 사고가 있었다고 한다. 인조 2년(1624년) 3월 5일의 조선왕조실록 기사에서는 광해군 때에 이미 사대부의 종들이 사는 방조차 모두 온돌인데 나인들이 판방에서 지내는 것이 좋지 않다 하여 나인들의 방도 온돌 방으로 바꾸었다는 대목이 나와 궁궐에 온돌의 보급이 완료되었음을 알 수 있다. 기후가 유난히 추워서 소 빙하기라고도 불리는 16~17세기를 거치면서 온돌은 점점 많이 보급되었으며 조선 후기에는 보통 백성의 초가집에도 온돌이 넓게 사용되었다.

온돌의 연료

전통적인 온돌은 아궁이의 연료로 주로 짚, 또는 나무를 사용했다. 숙종 때의 김덕기는 동래에서 말똥으로 만든 땔감을 만들기도 하였으며 숯이 이용되기도 했다. 그러나 전통적인 온돌은 땔감으로 나무를 너무 많이 소모하였으며 환경을 파괴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 조선시대에 땔감은 면포와 쌀과 함께 가장 중요한 생활용품이었다. 1960년대 이후로는 주 연료가 연탄으로 대체되었으며 현재는 석유, 가스를 사용하는 보일러가 많이 보급되었다. 궁궐에서는 시목을 공물로 제공하는 기인(其人)이 땔감과 숯을 공급하였으며 민간에서는 보통 사내아이들이 나무꾼 노릇을 많이 하였다.

현대의 온돌

1970년대에 들어와서는, 일산화탄소 중독의 피해를 줄임과 동시에 열효율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온돌 형식을 활용한 온수 보일러가 개발되어서 현재까지 사용되고 있다. 지금은 가정에서의 난방 방법으로 전통의 온돌을 대신하여 온수보일러가 광범위하게 사용되고 있다. 오늘날, 도시 지역 등의 온돌용 연료 수급이 어려운 지역에서는 전통 온돌을 보기 힘들며, 그 대신 온수 보일러, 온돌 마루, 심야 전력을 이용한 전기온돌 등의 다양한 방법이 사용되고 있다. 이는 편의성, 전통적 연료의 공급 문제, 가스 중독 등의 안전성의 이유와, 설치와 관리의 용이함 때문이다. 현재의 온수 보일러는 연탄, 석탄, 석유, 전기 등, 다양한 에너지를 사용하며, 경우에 따라서는 여러 종류의 연료를 혼용할 수 있거나, 연탄이나 석탄 연료의 반자동 교체, 심야 전력의 사용 등 열효율과 편의성을 고려한 비용 절감형의 새로운 설계가 계속 연구 개발되고 있다.

온돌용 연료 구입에 큰 장애를 받지 않는 지역에서는 오늘날에도 전통 온돌이 시공되고는 있지만, 연료와 가스 중독 문제 때문에 사람이 거주하는 건물 등은 관계 법령에 따라서 엄격한 시공 규격과 시공 감독 사항이 적용된다. 사람이 사는 집 외에도, 축사와 온실의 난방 방법으로 농가에서 비교적 쉽게 구할 수 있는 연료 (짚과 나무 혹은 연탄)를 사용하는 전통 설계 형식의 온돌이 사용되기도 한다. 또한 온수 파이프의 동파나 관리상의 이유 등으로 온수 보일러의 설치가 적당치 못하고, 석탄, 석유, 가스 등의 지속적인 공급이 어려운 오지, 산지 고지대, 도서지역 등에서는 아직도 전통 온돌이 빈번하게 시공되어서 사용되고 있다.

온돌의 구조

시대와 지방에 따라서 온돌 설계 구조에 약간씩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가장 기본적인 요건만을 맞추어 온돌을 만든다면, 아궁이에서 불을 피우고 그 아궁이의 열기가 구들장의 고래를 타고 굴뚝으로 빠져나가는 구조를 가지고 있다. 불기를 머금은 연기가 지나가는 순서는 다음과 같다.

부뚜막의 아궁이 : 불을 피워 열기를 발생시키는 장소이다.

방이 작은 경우에는 한 아궁이 (또는 두 아궁이)에 외방 구들이 연결된다.
방의 크기나 집의 구조 등에 따라서 여러 개의 아궁이가 붙어서 하나의 구들로 연결되기도 하고, 하나의 아궁이에 여러 개의 구들이 연결되기도 한다.
작은 집은 부엌의 부뚜막과 하나로 되어 있고, 큰 집에는 각 방 또는 건물마다 따로 난방용 아궁이를 놓기도 한다. 부뚜막의 아궁이는 구들보다 낮게 놓이게 되므로, 부엌의 바닥은 집안에서 그 높이가 가장 낮은 지역에 속한다. 부뚜막의 아궁이에서 태우는 불로 난방과 취사를 겸하고 있으며, 부엌의 바닥이 낮아서 재래식 부엌의 부뚜막은 그 높이가 허리 이하인 경우가 많다. 이는 취사 노동시 사용자의 불편함을 초래하는 설계이다.

불목 : (불고개, 부넘기 또는 부넹기): 아궁이에서 발생한 열기가 방의 바닥 ( 구들 )으로 들어가게 만드는 곳이다.

솥을 거는 부뚜막 벽면에서 시작해서 구들장 밑의 고래로 연결되는 열기의 통로다. 아궁이 뒷부분 (후렁이)을 통해서 들어온 열기를 구들개자리와 고래로 넘겨주는 턱진 공간이다. 아궁이 의 세찬 화력이 제대로 빨려 들어올 수 있도록 그 넓이와 높이를 잘 조절하여서 만들어야 한다.
불목 위로 돌을 고여서, 이것으로 불목의 넓이를 조정함으로 열기의 유입량을 조절할 수 있다. 북조선이나 만주 등의 혹한 지역에서는 많은 열기를 받아들일 수 있도록, 불목의 모양이 둔턱에 가까운 넓고 큰 구조로 되어 있다. 후렁이와 불목이 너무 좁으면 열기가 제대로 빨려 들어오지 않는다. 후렁이와 불목이 너무 넓으면 화기가 없을 때 차가운 바깥 부엌의 공기가 그대로 흘러들어 옴으로 구들이 빨리 식어 버린다. 불목은 불을 피울 때의 연료량과 불이 꺼진 후 구들 전체의 '잔류 온기' 등의 열효율에 큰 영향을 준다.

구들개자리 : 방의 첫 부분에 해당하며 이 윗부분이 아랫목에 해당한다.

고래가 시작되기 이전에 있으며, 고래 보다 깊게 파여 있는 공기와 열기의 혼합 장소이다. 주석:고래-방의 구들장 밑으로 나 있는, 불길과 연기가 통하여 나가는 길. 불목에서 넘어온 열기의 속도를 떨어뜨리고, 열기가 구들 내부의 비교적 차가운 공기와 섞여 퍼지면서 난방에 도움은 주는, 실제적 첫 도입부이다. 이 부분 (아랫목)의 구들장은 윗목의 구들장보다 두껍게 깔린다. 가로 세로가 구들장 1 개 돌판 보다 작고, 깊이는 고래 바닥에서 약 30 cm 정도의 깊이지만, 그 크기와 깊이는 지역의 기온과 기타 설계에 따라서 차이가 있다. 혹한 지방은 얕은 구들개자리와 큰 불목으로 설계한다.

구들장

한국의 조상들은 구들장으로 주로 운모를 사용하였다. 그중 백운모를 사용하였는데 백운모가 열 보존 시간이 크고, 절연체였기 때문이다. 구들장에 쓰이는 다른 암석들에도 주로 운모라는 광물이 대부분 함유되어 있다. 이는 취사 노동시 사용자의 불편함을 초래하는 설계이다.

온돌의 종류

오스트리아의 '라우흐 하우스(Rauchhaus)'

집의 3대惡 중 하나가 '연기'일 만큼 원시적
12~13세기 유럽 사람들은 가축들과 한 지붕 밑에서 서로 체온을 보태며 살았고 집 한가운데에 ‘불자리’를 두고 모닥불을 피웠다. 이것으로 취사도 하고 추위도 이겨냈다. 불자리는 독이나 벽돌로 단을 만들어 그 위에서 불을 피우기도 하지만 굴뚝이 없어서 연기는 박공의 구멍이나 처마 밑 출입구로 배출되었다. 그래서 항상 집안엔 연기가 가득했다. 독일어권, 특히 오스트리아는 이러한 집을 '라우흐 하우스 [연기집] '라 불렀다. 11세기경 독일어권 속담에 '집안의 3대 惡은 비가 새는 지붕, 바가지 긁는 아내, 그리고 연기'라 할 만큼 라우흐 하우스 방식의 난방은 원시적이었다.

연기에 시달리던 일부 지역에서 불자리 위의 지붕을 깔때기형으로 만들어 연기가 나갈 수 있게 한 형태가 나타났다. 그런데 그 크기가 지붕 전체를 차지할 정도로 거대했다. 그 깔때기 형태의 연기배출 시설을 '라우흐슐롯'이라 했다. '라우흐슐롯' 형태는 알프스 산간지역에서 특히 17~18세기에 유행했다. 이러한 형태의 난방시스템은 연기가 잘 빠져나가 연기 고민을 덜어주는 대신 큰 결점을 보였다. 난방효과가 신통치 않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연기가 빠져나가는 통로로 집안의 열기도 같이 빠져나갔기 때문이다.

독일의 '슈빕보겐헤르트'

굴뚝이 없는 라우흐하우스의 화덕같이 생긴 불자리는 '슈빕보겐헤르트'라는 것으로 발전했다.
벽돌로 단을 만들고 불자리 좌우에 바람막이 벽을 세우면서 위쪽도 막아 불티가 솟는 것을 방지한 형태다. 하지만 여전히 굴뚝은 없었다. 그냥 불을 피우면 연기는 위쪽의 구멍을 통해 방의 내부로 퍼졌다가 적당히 외부로 배출됐기 때문이다. 그저 불자리가 좀 더 안전하고 견고해졌다는 것 외에는 변한 게 없는 형태였다.

벽에 불이 접촉되어 벽이 갈라지고 무너지는 일이 발생한 것이다. 그래서 이를 막기 위해 나중에는 불 뒤편 벽에 쇠로 판을 만들어 부착했다. 벽도 보호하고 방으로 열기가 더 많이 반사되어 난방효과가 더 강해졌다. 이러한 형태는 18~19세기 독일 농촌지역에서 많이 볼 수 있는 형태가 되었다. 슈빕보겐헤르트'는 벽돌로 불자리를 막았지만 여전히 연기문제는 해결할 수 없었다.

서 유럽에서 쓰던 '벽난로'

불타는 속도와 화력을 조절하는 시스템
벽난로는 유럽의 기후가 비교적 온화한 스페인, 프랑스, 영국 등 서유럽에서 많이 쓰인 난방형태다. 지금도 애용하는 방식이지만 첫 등장은 8~9세기 경이다. 처음에는 벽에 붙여 만들었기 때문에 이름이 벽난로라 할 뿐 별도의 굴뚝이 없어서 앞의 "라우흐 하우스" 와 별다른 차이가 없었다. 대개는 수도원이나 성(城)에서 사용했는데 이런 곳은 천장이 높고 방이 넓어 연기가 크게 문제 되지 않았다. 다만 공간이 큰 만큼 난방효과가 적어 불 가까운 곳만 추위를 견디는데 효과적이었다. 이러한 벽난로가 일반 서민들에게 퍼지는 데는 200 년이 더 걸렸다.

벽난로의 역사 및 원리

'프랭클린 벽난로' 변천과정 - 처음에 고안한 벽난로는 철판 두개를 단순히 엇갈리게 놓은 형태(좌측 그림)였으나 후에 철판을 움직이게 해(우측 그림) 방열판 역할을 하게 했다.벽난로에서 불과 연기는 한 몸이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연기는 내 보내고 열기는 잡아 둘까 궁리했다. 프랑스의 '루이싸보'라는 건축가가 1640년경에 아이디어를 냈다. 철판으로 벽난로의 바닥을 10cm 정도 올리고 바닥과 불 뒤편 벽을 띄어 공간을 낸 것이다. 그렇게 하면 그 빈 공간의 공기가 데워지고 아울러 벽난로 바닥을 통한 열 손실이 줄었기 때문이다. 지금 생각하면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나 당시에 이것은 혁신이었다.

피뢰침을 발명한 것으로 유명한 미합중국 개국공신 벤자민 프랭클린은 1740 년경, 벽난로가 따뜻하지 않고 건강에도 좋지 않다고 판단해 직접 벽난로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철판 두 개를 15cm 가량 엇갈리게 설치해 불꽃과 연기가 이 틈으로 들어가게 했다. 이렇게 함으로서 굴뚝으로 들어오는 외풍을 줄이고 연기도 감소시키는 효과를 주었다. 프랭클린은 이 시스템을 발달시켜, 철판을 수직으로 걸어 움직일 수 있게 바꿨다. 이렇게 하니 외풍의 양을 조절할 수 있어 방열판 역할을 할 수 있게 되었다.

프랭클린은 다시 세 번째 아이디어를 냈다. 벽난로 앞 양쪽 안벽에 수직으로 홈을 만들어 철판을 넣은 후 이 철판을 밀어 올리거나 내리는 정도로 불타는 속도와 화력을 조절했다. 또 벽난로 앞 부분에 연소를 돕는 공기 유입구를 만들고 바닥 밑에는 벽돌 몇 장을 들어내 신선한 공기가 벽난로 내부의 빈 공간으로 유입돼 데워지도록 통로를 마련 했다. 바로 이 벽난로가 '프랭클린 벽난로'다.

독일의 '철제 난로'

연기가 많이 나는 난로의 단점을 보완
1475년에 주물로 만든 난로, 즉 철제 난로가 등장했다. 독일의 '지거란트'지역과 '아이펠' 지역은 철 생산과 주물공장이 많이 모여 있었는데 이곳에서 만들어져 독일 북부 지역과 스칸디나비아반도 등 동북유럽에서 주로 사용됐다. 이 난로는 기존의 벽난로와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불을 벽 사이에 두고 부엌 또는 복도와 분리해 난방을 했기 때문에 실내에 연기를 발생시키지 않았다.

철제난로의 역사 및 원리

초기 철제 주물 난로는 기술이 부족해 4각형의 판을 만들어 박스 형태로 붙이듯 조립해서 썼다. 벽 뒷면에 구멍이 두 개 위아래로 있었는데 아래 구멍으로 불을 지피면 윗구멍으로 연기가 나오는 시스템이었다. 윗구멍은 대개 부엌 또는 홀과 통했는데 이곳을 통해 출입구나 처마의 틈새로 연기가 빠져나갔다.

철제 난로는 대개 벽에 붙였으므로 5개의 쇠 판이 쓰여서 '5쪽 판 난로'였으나 나중에는 난로를 벽에서 일정 간격 띄우는 경우도 생겼다. 이 땐 '6쪽 판 난로'가 되는데 이것은 난로의 뒷면에 공기가 스쳐 발열 면적이 넓어지므로 열을 조금이라도 더 얻는 구조였다. 난로가 벽에서 떨어짐으로 연통이 필요했다. 난로에 연통이 부착되면서 사람들은 한 가지 현상에 주목했다. 연통을 가능한 많이 만들어 구불구불하게 꺾어 길게 엮으면 열을 좀 더 많이 취할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미국의 '온수 라디에이터'

열 손실 막기 위해 난로의 구불구불한 연통 활용
지금의 온수 라디에이터 난방 방법은 세계 어느 곳에서나 볼 수 있는 보편적인 난방방식이다. 이 라디에이터 난방은 17~18세기에 등장했다. 처음엔 온수가 아니라 수증기를 이용해 펌프나 운반 기계를 만드는 장치에 이용하는 것이었다. 특히 17세기 광산산업이 번창하면서 땅속 지하수를 퍼내는데 이 방식을 이용해 좋은 효과를 봤다.

라디에이터의 역사

1652년 영국의 정원 건축가 '휴 플랜'이 처음 '저압 증기난방'을 고안했다. 정원 건축가이니 만큼 온실의 난방을 위한 것임은 말할 나위가 없었다. 그러다 1745년 '윌리엄 쿡'이 저압 증기난방을 주거용 증기난방으로 아이디어를 냈지만 당시엔 큰 주목을 못 받았다. 1784년 우리가 잘 아는 증기기관의 창시자 제임스 와트가 증기난방을 자기의 작업실에 설치하면서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하지만 증기난방은 압력을 제대로 조절하지 못할 경우 폭발해 버리는 치명적 단점이 있어 사람들의 기억으로부터 멀어져 갔다. 온수를 이용한 난방은 그 이후에서 영국, 스위스 등에서 계속 실험적으로 이루어졌으나 일반적 난방방식으로는 알려지지 못 했다.

오늘날 라디에이터의 모습은 1830년에 나타났는데 안타깝게도 발명자가 누군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온수 라디에이터를 기존의 집에 설치하기에 너무 번거로웠다. 온수 라디에이터가 넓게 퍼지게 된 계기는 2차 대전이었다. 전쟁으로 거의 대부분의 가옥이 파괴되고 전후 새로 집을 지어야 했는데 이때 라디에이터 난방방식을 도입하게 된 것이다. 이때 전 시대에 썼던 철제 난로 방식을 활용했다. 즉 철제 난로의 구불구불한 연통이 난방에 유리하다는 것을 깨닫고 주름을 넣은 라디에이터가 나온 것이다.

일본의 난방 기기 꼬다쯔

상 밑에 방열기구를 넣고 그 위에 이불을 덮은 형태의 겨울철 난방기구로 사람들은 이불 속, 상 밑에 발을 넣고, 정담을 나누거나 독서 따위를 한다. 한국 사람들에게는 그리 낯익은 물건이 아니지만, 한국과 같은 온돌 장치가 없는 일본에서는 겨울나기에 없어서는 안될 필수 품목이 바로 꼬다쯔이다. 꼬다쯔는 일본의 전통적인 난방기구로, 현대에는 전기를 이용해 보온을 유지하는 작은 용기 위에 야구 라라는 나무틀을 설치하여 그 위에 이불을 덮어서 만든 것이다. 이불 아래 발을 넣어 따뜻하게 하는 방법으로 매우 경제적이어서 서민 가정에서 특히 사랑을 받는다. 이불 위에 네모난 판자를 놓아 식사할 때는 식탁으로, 보통 때는 다용도 책상으로 사용하므로 겨울철 가족생활의 구심점이 되기도 한다. 눈 내리는 하얀 겨울, 키 낮은 등불 아래 온 식구들이 꼬다쯔를 중심으로 발을 한데 모으고 앉아 구운 떡을 먹으며 도란도란 담소하는 따뜻하고 소박한 모습, 생각만으로도 가슴 훈훈해지는 듯하다.